담양읍 백동리 고사리등 유래, 고사리등과 웃지 않는 세 대신.hwp
고사리등과 웃지 않는 세 대신
담양읍 백동리 3구는 현재 ‘신기’마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이해섭 회장에 따르면 이 명칭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본래 이름은 ‘고사리등’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노일들은 ‘고사리등’이라는 지명을 기억한다.
고사리등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높을 고(高), 선비 사(士), 관리 리(吏), 오를 등(登)으로 ‘높은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등용되었다’는 뜻이다. 즉 이 고을에서 인재가 많이 났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의 전설은 고사리등이라는 지명이 비롯된 이 곳 출신의 세 대신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장원급제해 높은 자리에 오른 세 대신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들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랬동안 이들을 지켜봐온 윗사람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어느 날 잔치를 베풀어 초대했다. “내가 그 동안 지내오면서 그대들의 웃음소리와 웃는 얼굴을 한번도 듣거나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인지 오늘 이 자리에서 한번 들어나 보세. 어디 속 시원히 마음을 털어놔 보소.”
이렇게 해서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김 아무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소인이 혼인한 지 얼마 안돼서의 일입니다. 혼례식을 마친 후 처거에서 사흘 동안 지내고 처와 함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태풍이 일면서 폭우가 쏟아지더니 배개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었습니다. 삽시간에 배에 물이 들이 차면서 살려다라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선장이는 자가 일어나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큰 죄인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서 용왕께 바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게 됩니다. 그 죄인을 찾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저고리를 벗어 바다에 던져 저고리가 가라앉으면 그 사람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한 사람씩 윗저고리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았는데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제가 먼저 저고리를 벗어 던졌는데, 제 옷은 파도를 따라 떠내려갔습니다. 이어 제 아내가 웃옷을 던지자 마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습니다. 순간 천둥소리가 요란해지며 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에 탔던 사람들은 제 아내에게 빨리 바다에 뛰어 들라고 강요했습니다. 제 아내는 소인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치마를 머리에 둘러쓰고 바다에 뛰어 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행길에 이 같은 일을 당한 소인이 어찌 웃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야기를 마쳤다.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숙연해진 가운데 이 아무개도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저 역시 혼례식을 마치고 처음 등청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조반을 마치고 막 토방에 내려서는 순간 방에서 두루마기의 끈이 당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어서 끈을 놓으시오. 첫 등청날무터 이 무슨 짓이오?’하고 처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방안에 있던 처가 끝내 옷고름을 놓지 않으니 저는 크게 노해 그 길로 신방에 대한 출입을 끊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한 달후 처가 신방 밖으로 한걸음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된 집안 어르신들이 저에게 ‘아무래도 네가 가서 열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신방 문고리를 잡고 열자 힘 센 하인들이 당겨도 꼼짝 않던 문이 쉽게 열렸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로 넘어 졌으니 방안의 신부를 머리를 산발한 채 눈을 뜨고 죽어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무릎에는 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사방님. 너무나 억울하옵니다. 두루마기의 옷고름은 문고리에 걸려 떨어졌습니다. 어찌 등청하는 서방님의 옷고름을 제가 잡아당기겠사옵니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그제야 눈을 돌려 살펴보니 떨어진 옷고름이 그때까지도 문고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소인이 이와 같은 억울한 아내의 죽음을 보고 어지 웃을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소인이 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하고 말을 마쳤다.
이어 마지막으로 남은 박 아무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인이 웃지 않는 이유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소인은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님과 단 둘이 살았습니다. 제가 과거를 치르러 집을 떠나던 날 아침의 일입니다. 그날 어머님이 지어오신 아침 밥상에는 평생을 두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하얀 쌀밥 한 공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쌀밥은 부잣집에 품팔이를 다니면서 절구통에서 떨어진 낟알을 한 알 한 알 주워모아 10여년을 간직해 오다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는 소인을 위해 내 오신 것이었습니다. 차마 그 밥을 먹을 수가 없어 어머님이 드시라고 권하다 급하게 집을 떠났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 앞으로 어머님을 정성껏 모실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어머님은 제가 떠나온 방에서 헤어질 당시 모습 그대로, 밥상 앞에 앉아서 눈을 뜬채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밥상 위의 흰 쌀밥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쌀밥 한 번 먹어보지 못한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과 그 어미의 헌신적인 사랑이 오히려 마음 아팠던 자식의 마음이 서로 전달되지 못했으니 어찌 제가 웃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말을 마쳤다.
세 대신들의 애틋한 사연을 모두 듣게 된 윗사람은 “그대들이 웃지 않는 까닭을 오늘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며 위로했다고 한다.
‘고사리등’전설의 이 아무개나 박 아무개 처럼 우리는 본의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서 오해를 사거나 오해를 하며 살아간다. 침묵이 금일때도 있지만 때로는 충분한 설명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산림청은 최근 일제때 바뀐 전국의 산 39곳 이름을 원래 우리 이름으로 바로 잡는다고 밝혔다. 우리 지역에도 일제에 의해 바뀐 지명들이 쓰이고 있다. ‘우리 땅 이름 바로 잡기’를 통해 고유 전설과 지명에 깃든 의미를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료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이해섭 회장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ratiawee&logNo=10001832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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