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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양림동산에선 박선홍 선생. 멀리 선생이 평생 사랑해온 무등산이 하얀 눈이불을 닾고 있다. |
ⓒ 전라도닷컴 김태성 |
박선홍 선생(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장)의 말씀을 간추리는 건 행복한 고역이다.
“오래 살다보니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라 했지만, 선생은 고향의 전모를 꿰었다. 시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무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첩첩한 자료들이 술술 풀려나왔다. 흥미진진 곁가지로 한참 흐르다 어느새 줄기로 되돌아와 상응했고, 이따금 깊숙이 파헤쳐 인과를 명쾌히 했다.
광주·전남에 관한 무궁무진한 정보의 바다가 머릿속에서 찰랑찰랑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정연하게 뽑아내는 팔순 어른의 총기가 경이로웠다.
광주·전남에 관한 무궁무진한 정보의 바다가 머릿속에
지난 1월17일 토요일 오전 10시쯤.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 한 강의실이 꽉 찼다. 광주 남구청이 마련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의 강의는 몰려든 청강생들로 선생의 명성을 실감하게 했다.
1952년 노산 이은상 선생이 호남신문사 사장 시절 지은 <전남 특산가>를 풀이하는 날이다. 교재 준비가 지체되자 선생은 무등산 이야기를 덤으로 들려주었다.
“1955년 전남산악회 만들고 무등산을 다닐 때부터, 자료를 모아볼라고 했는데 일본식 기록이 많았어요. 명치 몇 년 이런 식이었지.…제봉 고경명 선생이 동래부사를 했으니까 지금은 부산시장이어요. 그걸 그만두고 지실 식영정에서 여생을 보내는데 임진왜란이 났어요. 그때 60이었는데, ‘아 이건 내가 나서야 후진들이 따라오겠구나’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의병을 나갑니다. 그 수가
7100명이어요. 7천 의병은 의병사상 젤 많아요….”
의병장 고경명 선생에서 ‘의향 광주’의 뿌리를 캐낸다. 또 1976년 초판을 내고 지난해 11월 일곱 번째 증보판을 낸 역작 《무등산》의 바탕이 된 자료수집과 답사가 무려 반세기에 걸친 여정임이 드러난다.
<길손이 막대 던져 천리강산 헤매더니/ 여기가 어디메요 그림 속에 들었구나….>
이제 <전남 특산가>다. 시조도 명문이려니와 종횡무진 풀이는 해박한 향토학의 백미다.
“광주전남이 복된 곳입니다. 기후 좋고 산물 풍부하고 인심도 좋지요. 자! 한번 봅시다.”
맺고 끊고 줄이고 늘이고… 박진감이 넘친다. 고향 자랑까지 신명으로 보태져 청중은 넋을 잃고 흠뻑 빠져든다. ‘벌교 화중선이 치마 끌고’ 대목. 당대 최고 여성 소리꾼 이화중선 집안과 한국 최초 판소리 레코드판이 일본에서 나오는 우여곡절 찰지다.
“일정 때 3백(白)2흑(黑)1청(靑)이라 했어요. 면화 양잠 쌀 김 무연탄 죽세품인데 전남 대표 산물이었어요. 이 면화가 방직산업의 기초인데, 세계적으로 공업의 시초가 직조부터요.”
이어 영국 산업혁명, 일본 도요타 자동차 기원인 도요타 방직기계, 목포 고하도 면화 시배, 목포(木浦)가 목화포(木花浦)로 불리던 이유, 광주 가네보 방직공장 등이 순식간에 봇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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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닷컴 김태성 |
피폐했던 전후 무등산은 유일한 위안의 공간
‘김’ 이야기에 이르자 “분개가 막 난다”며 다소 격앙되신다. 조선 인조 때 광양 태인도에 유배된 선비가 김을 발견한 사건과 ‘김씨가 섬진강을 건너와 화개장터에서 팔았다’ 해서 김이라 한 유래, 완도가 일제에 의해 김 주산지가 되었으나 옛 품질을 잃어버린 안타까움…. 조선에서 일제로, 해방직후에서 현재까지 시대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총독부, 일본 내무성, 전남도청, 수협까지 기관들이 총동원되고 역사 인물들이 무시로 들락날락이다.
“일정 땐 송중대동풍추 6개 등급이 있어요. 1등급 송표는 백짓장처럼 엷고 칠흙같이 검고 옻칠처럼 광택이 반짝반짝 했어요. 해방되고 이것들이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우리는 등외품이나 미검사품만 먹게 되었어. 수협책임자도 6개 등급을 몰라….”
최고의 김을 일본에 빼앗긴 분통이 터졌다. “배래부럿다”는 표현에 애석함이 절절하다.
“동복삼은 재탕만 먹어도 개성삼 보다 낫다/ 자식 낳고 나주목사 한번 시키면 원이 없다/ 완도에선 개들도 지전을 물고 다녔다/ 광주, 순창장에서 못판 고기 담양장서 다 팔았다/ 광양 돌김 못 묵으면 죽어서 염라대왕한테 가들 못흔다….”
정말 가멸찬 궁구(窮究)의 증언들이다. 유수인양 거침없는 속담 속설은 맞춤한 비유와 해석으로 듣는 이의 묵은 갈증을 푼다. 한정식의 원조 황금동 천미장, 우리 소리의 맥을 이은 예술인들인 기생이 왜곡 폄훼된 까닭, 광주 도심의 호랑이 잡는 구덩이 이야기….
점심시간에도 오락가락 질문이 터지고 선생은 소상하게 답을 하셨다. 가까스로 마주앉아 무등산에 얽힌 말씀을 더 여쭈니, 피곤도 무릅쓰고 흔쾌히 응하신다.
“어머니 따라 무등산을 다녔어요. 어머니들은 물 맞으러 많이 다녀요. 절에 다니시고. 산에 가려면 20일 전부터 비릿내 난 것 안묵고 궂은 데 안가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요. 산은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을 어려서 가졌어요. 학교에 가서 원족이라고 소풍을 가고….”
무등산과의 인연은 모태신앙에 가까웠다. 본격적인 등산은 1955년 지역 최초로 산악회를 만들면서다. 피폐했던 전후 무등산은 유일한 위안의 공간이었다. 산을 통해 서로 위로하고 희망도 갖자며 등산을 하고, 자연스레 산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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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기념회에서 단가 '사철가'를 부르는 윤진철 명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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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은 명분이 서면 따라갑니다”
전남산악회는 이후 광주전남산악연맹, 각 대학 산악연맹의 모태가 되었고 ‘무등에서 에베레스트까지’라는 기치 아래 세계적인 등반기록을 남긴 젊은 산악인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땐 민둥산이었어요. 오죽하면 코스모스 씨앗을 가져다 뿌리자 했겄어요. 나무를 베어다 장에 팔고 모도 그랬으니까. 그걸 막으니 산감인줄 아는 사람도 많았어요.”
선생의 무등산 사랑운동은 60년대 중반부터 연료가 연탄이나 기름으로 바뀌고, 사람들 인식
도 달라지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70년대 중반쯤 산에서 고기나 구워먹고 오자는 풍조가 생겼어요. 코펠 버너가 나오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산 전체가 불고기 잔치가 됩니다. 녹음기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이래 노니까 계곡은 오염 되죠. 냄새 진동하고 냉갈은 나고….”
선생은 적십자사, YMCA, 청년회의소, 보이스카우트 등 여러 단체들과 더불어 무등산에서 취사안하기 운동을 벌였다.
“광주시민들이 참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석 달 정도 헌께 딱 잡혀요. 저야 이름만 걸었지 김차현 김인주 이런 젊은 사람들이 고생했지요.”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내무부는 광주의 민간운동을 모델로 전국 국립공원 도립공원에 취사안하기 운동을 폈다. 선생이 물꼬를 튼 셈이다.
무등산이 다시 곤경에 처한 건 80년 이후 매년 12월31일 저녁이었다. 전국의 민주인사들이 도청 앞에 모여들고, 급기야 ‘새해맞이는 민주의 성지 광주 무등산에서’의 분위기로 번졌다. 해맞이 인파가 구름처럼 산을 오르고, 추위 때문에 불을 피우면서 피해가 나기도 했던 것. 역시 선생은 “새해맞이는 되도록 무등산을 피하자, 산에 가더라도 불은 피우지 말자”며 호소했다.
“광주시민들은 참 위대합니다. 바로 먹혔어요. 명분이 서면 따라갑니다. 그 대신 불의를 보면 못 참아요. 의병도, 학생독립운동도, 5·18민주화 운동도 그런 겁니다.”
이후 선생은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를 꾸렸고, 무등산 일대 15만평의 땅을 시민들 기증으로 조성해 무등산공유화재단까지 독립시켰다. 선생의 무등산 사랑운동은 유례없는 성공이었다. 또 선생은 산악회, 산악연맹, 보이스카우트, 청년회의소,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민학회 등 지역 내 각종 단체를 결성해 오늘의 힘찬 강물을 흘려낸 남상(濫觴)이었다. 상공회의소 40년 재직, 학교법인 조선대 이사장, 광주시 문화재위원 등 선생의 자취는 광주 곳곳에 두루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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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발한 눈꽃 숲 위로 푸른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은 서석대의 절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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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야
“무등산에 몇 번 올랐냐고? 산 높이가 1187 미터니까 그쯤 갔을 것이다 해요. 오륙십년 다녔으니 그리되지 않겠어요. 아 공부 그런 거 없고. 여기저기서 베껴 쓰고, 자료도 얻고. 시나 단체나 개인이나 그런 걸 하고 싶어도 무등산은 박선홍이한테 밀어주자 했지요. 그러니 자신이 없어서 자꾸 고쳐 쓰고… 다들 옆에서 밤잠 안자고 교정보고 고생했지요.”
《무등산》처럼 산 하나를 입체적으로 총망라한 저술이란 어디에도 없건만, 선생은 노상 주위의 공을 앞세운다. 천신만고 끝에 찾은 사료, 고문을 뒤지고 어렵사리 밝혀낸 진실, 빈손으로 돌아왔던 답사들, 옛 집의 기둥에서 갈망하던 역사를 만났던 희열… 그 모든 고구의 세월은 오직 책으로만 녹여낼 뿐 내색도 없다.
이제 선생의 뒤를 좇는 후학들은 향토학, 나아가 광주학의 정립을 주창한다.
“향토학이란 없었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이 ‘응 그때 그 집이 있었어?’ 하고 알은 체를 하니까 얘기가 되는 것 같아. 실은 참 소중한 것인디. 서울 문화는 빛나고 지방 것은 깎아내렸는데 요즘 목소리가 나와. 인자는 지방 대학들 연구가 상당하니까 잘 될 것 같아.”
선생은 시종 당신을 낮추고 후학들을 칭찬하고 독려하는 말로 맺었다.
“무등산은 경계선을 따지면 안돼요. 화순이니 담양이니 광주도 북구, 동구 하면 걸림돌이 되어요. 전체를 놓고 재인식을 해야지. 주상절리가 국가지정문화재가 되었는데 입석·서석 뿐 아니라 정상, 규봉도 주상절리대거든. 너덜까지 광범위하게 문화재로 하고 동시에 무등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야 위상이 달라져요.”
‘명분이 서면 행동하는 위대한 시민’에게 끝없는 찬사를 보내는 선생이야말로 기실 그 명분에 논리를 제공해온 원천이었다.
1926년 광주 충장로에서 태어나 83년 세월을 광주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봉사하고, 광주를 기록하고 증언하고, 광주의 미래를 가리키는 선생은 진정한 토박이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달인이었다.
글=황풍년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박스
광주의 모산(母山)에 바치는 신실한 사모곡
《무등산》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머니의 너른 품과 같다. 광주의 사랑과 분노, 기쁨과 눈물을 묵묵히 보듬어 안고 누대에 걸쳐 학문과 예술, 문화의 배경이었다. 그 품에서 만발한 생명의 꽃들이 오늘의 광주이며, 숱한 간난신고의 여정이 광주의 역사다.
박선홍 선생의 《무등산》(다지리 간·값 2만3000원) 일곱 번째 증보판은 신령스런 광주의 진산(鎭山), 위대한 어머니 산의 전모를 좇아온 필생의 기록이다.
와송정(臥松亭) 실체 등 새롭게 밝혀진 사실 추가
1976년 초판을 낸 뒤 30년이 넘도록 수정보완과 첨삭가감을 게을리 하지 않은 고구(考究)의 결실엔 선생의 열정이 오롯하다. ‘무등산의 유래·전설과 경관’이라는 부제를 단 증보판은 사계절과 식생, 유적과 유물, 정자문화, 사찰, 개발과 보존운동에 이르기까지 무등산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또 시와 노래, 사진과 그림 등 무등을 표현한 시인묵객들의 자취까지 촘촘히 걷어 올렸고, 흩어진 자료와 기록을 훑으며 답사와 고증에 진력해온 무등산 사랑의 결정판이다. ‘무등산’이 그저 책이 아닌, 광주의 모산(母山)에 바치는 신실한 사모곡인 이유다.
“무등산의 모든 것을 느끼려면 산속 깊숙이 파묻혀 가야만 한다.”(본문 중에서)
초판이후 77년·90년·97년·98년·2003년에 이어 7판까지의 증보편찬의 세월은 한결같이 무등의 품 속으로 깊숙이 파묻힌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원족’(소풍)으로 정상에 오른 소년이 그 산만큼 너른 가슴을 키워내 무등을 껴안아온 시간이었다.
그동안 《무등산》의 변화도 무쌍하여 340쪽의 책은 533쪽으로 몸피를 늘렸고, 300여 장의 칼라 사진을 실어 젊은 세대들에게 원색의 미를 선사하고자 했다. 한문으로 표기했던 지리지나 읍지 등 옛 기록들도 한글로 풀어내, 하나의 정보라도 모두에게 널리 알리려는 선생의 성의가 담겨 있다. 물론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과 무등산의 변천사를 추가했다.
호남은행 설립자인 무송 현준호가(家) 선영의 제각인 학선재(鶴仙齋)가 지금까지는 무송원(撫松園)이라 불렸는데 이번에 본명을 찾았다. 제각 상량문에서 명칭을 발견해서다. 또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전국 유일의 와송정(臥松亭)의 실체도 사진자료와 함께 제시되었고, 서석대·입석대 주상절리가 지난 2005년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된 사실도 반영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실 안팎을 넘나들며, 무수한 산행과 탐구, 고증에 바쳐진 선생의 용맹정진에 고개가 숙여진다.
“무등산의 아픔을 맨살로 감싸고 오염과 무질서와 난개발로부터 지켜낸 광주시민은 참으로 위대하다. 무등산이야말로 광주시민의 사랑과 애환의 장엄한 대서사시오 자손만대에 물려줄 찬란한 영광이요 전설이다.”(저자 서문에서)
자신의 공을 낮추는 헌정의 글은 무등에 깃들어 사는 모든 광주 시민들에게 뿌듯한 자긍마저 안겨주고 있다.
저자에 대한 공경과 감사 그득했던 출판기념회
혜운(惠雲) 박선홍 선생의 《무등산》 7판 출판기념회는 무자년 세밑 어느 날 참 조용하게 열렸다. 선생의 이력과 각계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감안하면 조촐했다. 그러나 고관대작 즐비하고 말과 음식의 성찬 요란한 여느 출판회와도 견줄 수 없는 저자에 대한 공경과 감사, 책을 향한 탐미가 그득했다.
2008년 12월23일 오후 3시30분, 국립광주박물관 세미나실. 향토학에 정진해온 선생의 삶과 자취를 우러르는 후학들이 한사코 마다하는 선생을 모셨다.
“무등산과 불이(不二)의 인연 하나, 광주 향토학계의 어르신 혜운 박선홍 선생님! 평생을 고구하신 《무등산》 7판을 출판하셨습니다. 1976년 초판이래 33년 만에 이루신 금자탑이라 하겠습니다.”
강현구 나홍채 윤여정 이계표 조현종 조정숙 주인택 황호균 김희태 정선종 김경수 김영헌. 직함을 떼고 이름 석 자를 내건 초청인들이지만 하나같이 향토의 역사와 지리, 민속과 문화재, 인물사 등에서 일가를 이뤘다할 학자들이다. 담박한 잔치는 가야금 병창과 대금연주, 단가까지 줄과 대, 사람소리로 삼색의 흥을 넣고, 《무등산》 초판에서 7판에 이르는 경과를 소상히 밝히면서 선생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바쳤다.
후학들은 “《무등산》이 기틀이 되어 지역 문화 역사자원을 고구 탐력하는 향토학의 또다른 출발이 되어야 한다. 특히 ‘광주학’으로 가는 시발점, 그 스타트를 오늘 모인 우리들이 발동을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선생은 30여 년에 걸친 조탁의 역사를 오직 후학들과 주위의 덕으로 돌리며 “책을 내고 나면 언제나 아쉽고 부족하고 오류가 보여요. 그래서 또 해야겠어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팔순을 넘기신 선생의 열의에 《무등산》 8판이 예고되고, 참석자들은 선생의 학수천년(鶴壽千年)을 염원하는 박수로 화답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자리는 학자들의 청빈낙(淸貧樂)으로, ‘어른’의 삶에 대한 시대의 공명으로 진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