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 영남알프스/지리산 산행자료

지리산 칠암자 순례 관련 보도

청이당 2010. 8. 9. 12:29

피서의 가벼움 말고 求道의 수고로움으로 오르라

지리산 ‘七암자’ 순례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8-04 14:17
▲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은 제법 길다. 지리산 종주에는 비할 수 없지만 일곱 군데의 절집과 암자를 다 둘러보자면 10시간은 족히 걸어야 한다. 그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소박한 암자의 정갈한 정신과 지리 주능선의 장엄한 조망과 함께 하는 길이다. 도솔암을 지나 상무주암으로 향하는 길에서 갑자기 안개가 밀려들었다.
▲ 실상사로 드는 입구에 피어난 백련.
▲ 한때 100칸이 넘는 건물마다 수도승들로 넘쳐났다는 영원사.
▲ 실상사 마당에 발굴작업에서 나온 옛 기와조각으로 쌓은 탑.
# 금대산에 올라 일곱암자 순례길을 가늠해 보다

지리산에는 이른바 ‘칠암자 순례길’이 있다. 삼정산(1261m)의 가파른 능선 아래 가느다란 숲길을 따라 일곱 군데의 암자와 절집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는 온통 짙푸른 이끼로 가득한 서늘한 숲의 정취와 지리산 주능선을 내다보는 호쾌한 전망, 그리고 고즈넉한 암자에 서려 있는 맑은 정신을 만난다. 도회지에서 때묻은 몸은 오르막길의 땀과 지리산의 청량한 바람으로 씻고, 때묻은 마음일랑 소박한 암자의 정취와 적막한 공간을 지키는 노스님이 건네는 찬물 한 바가지로 닦아내는 그런 길이다.

먼저 그 길을 가늠해 보겠다면 건너편 백운산과 금대산 자락의 안국사에 올라볼 일이다. 함양군 마천면에서 남원시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60번 지방도로. 그곳에서 지리산의 최고 조망처인 금대암으로 오르는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헐떡거리는 차를 타고 오르다가 산정상 무렵에서 좌회전하면 절집 안국사다. 안국사 마당에 서면 정면으로 우람한 삼정산이 눈앞에 다가선다. 이 산의 이마 위치쯤의 바위에 매달린 암자가 가물가물하게 올려다 보인다. 어찌 저렇듯 온통 숲으로 가득한 거대한 산의 꼭대기에 암자를 들여놓았을까. 장담컨대 그 까마득한 높이와 깊이가 주는 위압에 흠칫 놀라게 되리라. 그곳이 칠암자 순례길의 딱 가운데쯤인 문수암이다. 순례길의 들머리나 종착지가 되는 영원사와 실상사에는 차로 가닿을 수 있지만, 나머지 암자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숨듯이 들어서 있어 거친 산길을 두 발로 걷지 않고서는 당도할 수 없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암자는 해발 1000m를 오르내린다. 안국사에서 문수암을 올려다보노라면 산의 이마쯤에다 암자를 대롱대롱 매달아 지은 뜻을 짐작하게 된다. 칠암자 순례길의 암자들은 신도들과 교유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순전히 불법을 닦고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거친 곳을 찾아 세운 것이리라.



# 새벽부터 등산화 끈을 당겨 매야 하는 산길



칠암자 순례길은 함양의 도솔암에서 영원령을 넘어 영원사와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를 거쳐 도마마을 쪽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약수암을 거쳐 남원 실상사까지 이어진다. 암자를 거쳐 이어지는 산행거리는 15㎞가 넘는다. 거기다가 여느 산행처럼 길을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갈림길에서 내려섰다가 암자를 둘러본 뒤 다시 그 길을 되밟아 올라가는 수고를 보태야 한다. 그렇게 일곱 암자나 절집을 다 들러서 가자면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10시간쯤이 걸린다. 지리산 종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걷기에는 그리 만만한 산길이 아니다. 암자를 빼놓지 않고 돌아보겠다면 이른 새벽부터 등산화 끈을 조여매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순례길이 거칠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깊은 숲그늘에 들면 진초록 이끼로 가득한 나무둥치와 양치식물들이 습기를 머금고 있고, 곳곳에서 마주치는 계곡들은 제법 힘차게 물을 쏟아내고 있다. 여기다가 길을 걷는 내내 숲 사이로 건네보이는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까지 보태진다.

순례길의 긴 구간이 부담스럽다면 전체 구간을 두 개로 잘라서 1박2일 동안 걷는 방법도 있겠고, 일곱 암자나 절집 중에서 한두 곳을 빼고 도는 방법도 있다. 그중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이 함양 마천면 쪽에서 출발하되 도솔암을 빼고, 차가 닿는 영원사에서 출발해 상무주암과 문수암, 삼불사를 둘러보고 도마마을 쪽으로 하산하는 5∼6시간 코스다. 이 길은 출입통제지역이라 우르르 몰려가는 단체 등반객들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길은 호젓하게 암자를 찾는 신도나 순례객들에게만 열려 있다.



# 상무주암에서 엿본 무심과 무념, 그리고 해탈



칠암자 순례길에서 만나는 암자와 절집은 어느 곳이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다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 빼어난 곳이 상무주암과 문수암이다. 한때 100칸이 넘는 대찰이었다는 영원사를 지나서 6·25전쟁 무렵 빨치산들이 은거하던 산죽비트와 바위비트를 지나 영원령을 넘으면 상무주암이다. ‘무주(無住)’라 함은 불가에서 ‘일체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 반야삼매의 경지’를 뜻한다. 절집의 현판 ‘상무주(上無住)’ 의 글씨는 ‘원광’이란 뚜렷한 낙관을 보아하니 경봉스님의 솜씨다. 그의 글씨가 어찌 이리 깊은 산중 암자에 걸렸을까.

암자 마당에 서면 지리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봉에서 중봉, 천왕봉, 촛대봉,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거침이 없다. 지리산 종주 경험이 있다면 이곳에서 자신이 걸었던 지리산 능선을 하나씩 짚어보며 짙은 감회를 느낄 수 있을 터다.

상무주암은 내력도 만만찮다. 고려때 타락한 현세를 벗어나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정혜결사운동을 펼쳤던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고, 깨침을 얻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전남 순천 송광사에 세워진 지눌의 보조국사비에는 상무주암이 등장한다. “지눌이 옷 세 벌과 바리때 하나만 갖고 지리산을 찾아 상무주암에 은거했으니 경치가 그윽하여 천하 제일이며 선객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다.”

상무주암에는 이후에도 조계종 10대 종정 혜암스님과 곡성 태안사의 청화스님, ‘가지산 호랑이’로 불렸다는 비구니 인홍스님 등이 수행을 위해 머물고 있다. 30년째 상무주암을 지키고 있는 노스님에게 말을 청하니 ‘네 눈을 믿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러곤 “눈이 거짓말을 하고, 삶은 곧 꿈”이라며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왔을 터인즉 내 얘기가 무슨 소용 있겠느냐”고 일갈했다. 알 듯 모를 듯, 던지는 스님의 선문답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얼른 수첩을 펴들자 스님은 “적지 말라”고 호령했다. “보고 느끼면 떠나는 곳이니 내려가거들랑 다 잊으시오.”



# 암자의 티끌 하나도 다 산 아래서 온 것들이리라



상무주암에서 문수암으로 건너가는 길은 습기로 가득하다. 숲그늘 바위와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에는 초록 이끼가 피어있고 고사리와 관중 같은 양치식물들이 한껏 습기를 머금고 있다. 내리막 숲길을 걷다보면 문득 바위에 바짝 붙여지은 법당과 그 앞의 요사체가 나타난다. 문수암이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정적 속에 툇마루에는 금방 딴 듯한 호두열매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저 아래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봉스님이 산아래 마을에서 산길을 올라오는 중이었다. 도마마을에서 두 시간 남짓 거친 산길을 타고 암자까지 올랐단다. 올해 일흔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스님에게 “오르내리시기에 힘드시지 않느냐”고 말을 건네자 “평탄한 길보다 아직은 오르는 길이 더 좋다”며 웃었다.

스님이 배낭을 풀고, 산 아래 마천면 시장에서 사가지고 온 당근이며 양배추와 사과 몇알을 꺼내놓았다. 그제서야 암자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산 아래서 사람들의 힘으로 이고 지고 올라온 것임을 깨달았다. 내 한 몸으로도 이리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이렇듯 무거운 것들을 어찌 다 가지고 올라올 수 있었을까. 법당 뒤편에 뒹구는 깨진 맷돌이며 계곡물을 받아 흘리는 큰 항아리까지 암자의 모든 것들이 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산중의 암자에서는 티끌 하나조차 누군가 ‘믿음의 힘’으로 이곳까지 가져온 것이다.



# 순례길의 절집과 암자마다 깃든 오랜 내력



칠암자 순례길에는 상무주암과 문수암 외에도 이름난 절집과 암자들이 즐비하다. 영원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집으로 한때 100칸이 넘는 위세를 자랑했고 109명의 선지식을 배출한 유서 깊은 절집이다. 100칸이 넘는 대찰에서 불법을 닦는 스님들이 가득했을 당시의 풍경은 얼마나 장엄했을까. 그 흔적이 영원사 옆 숲속에 숨어있는 부도밭에 남아있다.

영원사 인근의 도솔암은 사명대사의 사형인 청매조사가 수행하고 열반한 도량이다. 전화도 전기도 들이지 않은 절집 마당에는 마치 땅에 꽂은 나뭇가지처럼 두릅나무가 자라고 있다. 문수암 아래 삼불사는 조선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구니들의 참선도량. 삼불사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찰이라기보다는 암자라 해야 더 어울리는 곳이다. 지리산 바람과 물소리가 가득하다. 약수암은 낡고 삭은 보광전의 풍모가 빼어나고, 구산선문 중 최초의 사찰로 개창했다는 천년고찰 실상사의 내력은 익히 알려져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함양·남원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 munhwa.com


가는 길

칠암자 순례길을 걷겠다면 들머리를 먼저 정해야 한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시작수도 있고, 반대로 전북 남원시 산내면을 들머리로 삼을 수도 있다. 함양 쪽에서 시작하겠다면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으로 나와 백무동 방면으로 향하다가 삼정마을로 들면 된다. 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시멘트 도로가 나있다. 길이 좀 거칠긴 하지만 조심조심 운전하면 승용차로도 가닿을 수 있다. 반대쪽 남원에서 시작한다면 산내면의 실상사를 찾아가면 된다. 원점회귀 코스가 아니므로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돌아올 때는 택시편을 이용해야 한다. 칠암자 순례길 중에서 영원사에서 상무주암을 지나 도마까지 이어지는 4km 남짓 구간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정한 출입금지 구간이긴 하지만, 암자를 찾아가는 참배객들에게는 구간통과를 허용한다. 간혹 불교신도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단 영원사로 가는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서 만나는 상무주암까지의 등산로는 통제되지 않았다.

묵을 곳

함양의 삼정마을은 지리산 벽소령 쪽으로 오르는 등산코스가 나있어 인근에 숙소들이 많다. 그러나 칠암자 순례길을 택했다면 삼정마을에서 영원사로 오르는 시멘트도로변에 있는 봉우리산장(055-964-0486)을 추천한다. 흰 수염을 기른 도인 풍모의 산장지기 김태룡(55)씨는 함양 마천이 고향으로 30여년 동안 서울살이를 하다가 8년 전 이곳으로 내려와 약초를 캐고 민박을 치면서 지내고 있다. 칠암자 순례길에서는 자칫 길을 잃기 쉬운데, 산장지기가 삼정산의 등산로를 손금 보듯이 꿰뚫고 있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봉우리산장에서는 지리산의 오미자, 산당귀, 산더덕 등의 약초로 만든 약재와 각종 산나물 등을 팔기도 한다.

 

 

암자 돌아 마음을 비우니 지리산이 품에 안겼다

지리산 ‘七암자’ 순례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8-04 14:17
▲ 지리산 국립공원의 삼정산 능선 아래 자리잡은 문수암 법당앞 마당에서 도봉스님과 봉우리산장의 산장지기가 산아래 마천면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암자는 먼 거리와 높은 해발고도로 속세와 높은 담을 치고 물러나 앉아있는 셈이다.
지리산(智異山). 시도 때도 없이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하는 산입니다. 새벽의 여명 속에서 어둠을 털어내며 화엄사를 출발해 노고단으로 차고 올라 벽소령, 세석, 연하봉을 거쳐 천왕봉까지. 지리의 주능선을 따라 2박3일 동안 100리를 걷는 지리산 종주는 여름휴가 때마다 꿈꾸는 ‘로망’이기도 합니다. 아마추어 등산인들이 ‘진짜 산꾼’이 되는 관문처럼 여기지만, 사실 지리산 종주란 ‘산을 타는’ 일만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그 고된 산행 속에서 자신 안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새로운 시작의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리산의 산길을 딛는 방법이 어디 ‘종주’만 있을라고요. 지리산 자락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칠암자 순례길’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지리산 국립공원 여든 다섯개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삼정산(1261m).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걸쳐진 그 산의 어깨쯤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까마득한 벼랑에 매달린 다섯 암자와 소박한 두 절집을 만납니다.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을 거쳐 남원 실상사까지. 산자락 턱밑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선 손바닥만한 암자들은 초라하지만, 구도자들이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 수행 중인 곳입니다.

차를 타고는 당도할 수 없는 길. 초록의 이끼들로 가득한 가파른 산길을 한걸음 한걸음 디디고 올라서야 당도할 수 있는 암자에는 노스님들이 진공 같은 적막 속에서 불법을 닦고 있습니다. 비질 자국 선명한 암자에 당도하면 바위틈에서 솟는 달고 찬 샘물을 받아드는 맛도 좋지만, 그보다 암자 툇마루에 앉아 노스님이 툭툭 던져주는 몇마디 말을 곱게 싸들고 돌아와도 좋겠습니다. 세속을 떠나 깊은 암자에서 무려 서른해 가까이 머물면서 닦은 공력이니, 스님이 웃으며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세상살이 지혜가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 떨어집니다.

칠암자 순례길이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산길에서 지리산의 전모가 환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을 앞마당으로 가진 암자에서는 하봉, 중봉, 천왕봉, 촛대봉에 이어 노고단 만복대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지리의 영봉들이 품 안으로 다가옵니다. 지리산 종주의 경험이 있다면, 하나하나 능선을 짚어가면서 성삼재에서 첫발을 내디딜 때의 긴장감과 세석산장에서 쏟아질 듯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터뜨린 탄성, 우의를 입고 이끼 가득한 청정한 숲길을 걷던 걸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칠암자 순례길에 올랐을 때,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시 한 편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있다. / 누구를 향해서인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 경계가 없는 경내 /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 문을 닫지 않는다 / 단지 산 안의 산의 파도가 / 흐린 안개속에 잔다. <이성선 시인의 산시(山詩) ‘초암에서’ 전문>

함양·남원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